일상을 살아가기 바쁜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라 하면 자신의 고단하고 치열한 혹은 지루한 일상과는 다른, 풍요롭고 우아하지만 한편으로는 격정적인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미술 평론가 임준근은 현대(contemporary)미술이 이론 물리학이 그렇듯 모든 이에게 이해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론가와 예술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소수의 지지자(컬렉터, 평론가, 갤러리 등)만 있으면 현대 미술은 존재할 수 있고, 그 방식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론 물리학과 현대 미술을 유비하는 논리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방식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실제로 현대미술은 소위 일반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감각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그것이 ‘앞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쉽게 대중에게 다가가는 작품들은 미술사적 가치가 낮은 작품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가치가 낮은 작품들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작품이 ‘일반인’들의 세계와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만난 수보드 굽타의 작품은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물건들은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그릇이었다. 이런 그릇을 확대하거나 여러 개를 뭉쳐 하나의 오브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친숙한 기성(ready-made)의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소재를 낯설게 하는 것을 넘어서 주제와 연결시키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확대된 용기를 여러 개 벽에 붙여 모이거나 흩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원형의 회전초밥 벨트 위에 그릇을 탑처럼 올려두거나, 거대한 양동이를 쌓아두는 것 그리고 수많은 그릇으로 장식된 굶주린 신을 쟁반 위의 낡은 슬리퍼가 바라보게 하는 것. 이는 자신의 주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도사람들의 생활을 정신과 육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히 묘사해내는 듯하다. 4대 문명의 발상지로 깊은 정신문화를 자랑한다고 하는 인도지만, 극심한 빈부격차, 사회 보장시설의 미비 등 제반 환경은 수많은 인도의 서민들을 어려운 일상으로 내몰고 있다. 작가는 오히려 이렇게 팍팍한 인도인의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스테인리스 식기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알을 만들어 낸 것처럼(“Egg”). 작가 스스로가 굶주린 신으로 인해 인간이 고통 받고 있을지 모른다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홍수, 가뭄 등으로 인한 기아는 굶주린 신에게 빛나는 식기를 바치게 했지만(“C.B. II”), 그 앞의 쟁반에서는 그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도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슬리퍼(“I believe you II”)에 흙먼지를 묻히며 걸어가고 있다. “Everything is inside”에서 의미는 더욱 명료해진다. 윗부분만을 절단하여 설치된 택시는 싣고 있는 짐의 무게로 인해 땅 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 같다. 인도인들의 흔히들 그러하듯 한 덩어리로 싸인 짐 보따리는 상당히 무거운 소재인 동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안에 있다”. 반짝반짝 잘 닦인 식기는 깔끔하고 세련된 인상을 주지만, “still life juggler”에서는 그릇이 부딪히는 소음과 떨어지는 순간의 이미지로서 고요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말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외부의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는 것은 예술의 핵심적인 역할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극단으로 흘러 자기만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자폐적 성향의 산물이 되어버린다면 남는 것은 공허함뿐일 것이다. 수보드 굽타는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그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일상의 흙먼지에 묻혀 보지 못했던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 식기 같은 우리의 삶을 포착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신성하고 고결한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의 세계는 철제 양동이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일상의 노동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Leap of faith”)을 말이다.
덧붙여